사진, 그 다차원의 결합체
구나연(미술비평가, 스페이스 애프터 디렉터)
1980년 철학자 존 썰(John Searle)은 '중국어 방'이라는 실험을 제시했다.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중국어 질문에 주어진 표에 따라 대답해도 중국어를 아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듯이, 아무리 컴퓨터가 사람처럼 보여도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뛰어난 정보 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해도 컴퓨터가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1
최근 소니 월드 포토그래피 어워드 우승작에 AI가 만든 이미지가 선정되었던 것을 상기해 보자. 그리고 이 '중국어 방' 실험을 사람과 컴퓨터가 아닌 사진과 컴퓨터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컴퓨터의 인공지능이 '사진 같은'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사진일까 아니면 그저 인공지능 정보 처리의 결과물일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 같은'의 '같은'이라는 형용사일 것이다. '사람 같은' 것이 사람은 아니듯이, '사진 같은' 것이 사진은 아니라는 논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가능하고, 모호한 논리라고 반박 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AI가 우리의 현실에 어느 때보다 깊숙이 파고든 이슈가 된 오늘, 활발히 활동 중인 젊은 사진작가들은 이 '사진 같은'의 논리에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치열한 질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무엇을 사진으로 볼 것이며, 어떤 이미지를 사진이라고 할 것인가?
이현우는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사유을 주요한 작업 토대로 삼는다. 그는 기술적 혁신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새로운 작용방식 가운데에서 '사진 같은' 것과 '사진'을 구분하고자 한다. 이 구분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이 뒤따라야 하고, 그는 이에 답하기 위해 사진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 빛으로 가시화된 세계가 담긴 像이라는 잠정적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이 가시화된 세계는 고유의 시간과 공간을 지니고 있다. 사진이라는 像에는 대상과 사진을 찍은 사진가의 시공이 공존하고, 그 시공은 사진 이미지 자체가 지닌 시공과 이를 보는 이의 시공의 갈래로 재차 이화한다. 따라서 사진의 시공간은 현재를 중심으로 여러 시제가 엉키고 결합하며 만들어진다. 이현우는 이것이 사진 이미지의 시간과 공간이 지닌 견고한 가능성이라 믿는다. 그리고 사진의 이 고유한 특성 자체를 사진 이미지로 포착하여 드러내고자 한다.
지난해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어디에 지금 우리는?》에서 그는 〈Overlayer, 2020〉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 작업은 그를 본격적인 사진 작업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깊은 의의를 갖는다. 그의 사진은 자신이 성장해 온 도시의 변화를 목격하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오랫동안 호흡해 온 시공의 변화가 축적된 인식이 찰나와 같은 현재와 마주할 때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는 "어린 시절 신도시 자리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봤던 기억과 함께 신도시를 인간의 관념이 구현된 곳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렇게 신도시의 풍경은 가상과 현실의 층위가 혼재되어 있는 이질적인 감각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가상과 현실의 혼재"란 어떤 '동시성'에 관한 것으로, 사진이 비단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이미지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시공의 얽힘과 관련된다. 여기서 가상은 작가의 인식 안에 축적된 기억의 이미지가 현재의 그것과 충돌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Overlayer〉 시리즈의 경우, 과거의 바다에서 매립지가 된 땅에 돌연히 남은 염생식물을 발견했던 좌표의 항공 이미지를 투명한 아크릴 판 위에 출력한다. 그리고 그 위에 3D로 재현한 염생식물의 이미지를 환등한 뒤, 공활한 매립지에 설치하여 촬영된다. 여기에는 그가 보았던 염생식물의 기억, 현재 매립지가 된 장소의 척박함, 그리고 어디에도 없으나 분명히 가시화된 식물의 일루전이 결합된다. 따라서 그가 촬영한 이미지는 겹겹의 두터운 단층을 형성하며 종횡적으로 구축된다. 자신이 목격했던 과거가 수직적 좌표의 항공뷰를 통해 먼 시간의 기억과 같은 거리감을 형성하되, 조감 특유의 넓은 스펙트럼으로 기억을 대체한다. 또한 이 투명한 과거는 막 개발에 착수한 수평의 매립지를 통해 관통되며 희미해지고 작아진다. 그러나 강하게 빛을 발하는 염생식물의 이미지가 그 기억과 현재를 묶어낸다. 사진의 '동시성'이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상태는 곧 정지를 통해 운동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평면의 이미지 안에 겹겹이 자리하고 있는 다발적 차원들은 시공의 선적인 운동 방향을 비틀고 굽히며 입체적으로 요동하는 것이다.
이현우의 작업에서 이 같은 다차원의 시도들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거칠 때만 구성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것은 시공의 연속되는 변이들을 사진으로 어떻게 담아낼 수 있으며, 사진이기 때문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선택한 것이 환등과 장노출, 그리고 투명성이다. 스위스 대사관에서 열린 《Breathing Walls》에 전시된 〈Soft Echo, 2021〉 시리즈는 그가 운용하게 될 사진 이미지의 방법론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한옥을 테마로 한 스위스 대사관 건물 내부에서 한국의 전통적 사물의 이미지를 폼보드 스크린에 비추었다가 카메라의 셔터 시간보다 그 스크린을 빠르게 빼는 방식으로 찍은 이미지는 사물이 지닌 물성과 비물성의 병치로 설계된다. 특히 환등과 장노출이라는 촬영방식은 이미지로 나타난 대상의 투명성을 통해 현재를 현상이라는 상태로 변화시킨다. 즉 그에게 현재는 세계의 포착으로 뚜렷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현상으로 경험할 때 나타나는 복합적 상태를 사진이라는 매체의 고유성을 통해 영위하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업이 〈Solid Reflections: Louise Nevelson, 2022〉이다. 미국의 조각가 루이스 네벨슨(Louise Nevelson)의 작품을 사진으로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 실험한 이 프로젝트에서, 이현우는 사진이 시공간을 담는 방식과 조각적 방식의 결합을 시도한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진에는 공간과 더불어 시간의 축이 있다. 그녀의 조각 작품이 담긴 사진 이미지에서 출발하여나는 사진이 담아내는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시간의 축을 연장하기 위해 장노출로 촬영하고 입체공간을 구조화 하기 위해 공간 기하의 기본요소인 입방체의 형태를 활용했다. 그리고 그것을 일정 시간 간격으로 움직이면서 시공간 단위를 만들었다. 노출 시간 동안 공간의 변형과 빛을 통해 투사되는 그녀의 작품 이미지가 작용하며 축적된 시공간은 단면의 이미지로 남는다."
이 작업에서 이현우는 네벨슨의 작품 사진 이미지를 촬영하고 그 평면 이미지를 입방체에 환등하여 조각의 입체성을 확보한다. 거기에 사진의 시간적 단층을 확장하기 위해 장노출로 대상이 천천히 회전하는 연속체적 운동을 포착한다. 그리고 네벨슨의 조각과 똑같은 사이즈의 이미지로 출력하여 이미지의 창출 과정에서 증발한 단단한 사물성을 시각적으로 감촉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시도는 조각을 매개로 사진이라는 매체의 또다른 리얼리티적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그가 네벨슨의 작품에 접근하며 마주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작업의 특성을 더욱 구체화하는 열쇠가 아니었을까? 네벨슨이 아상블라주 한 결합체는 각기 다른 상태와 기능의 사물이 동일한 색채의 조각적 상태로 이동한 것이며, 이현우의 작업이 지닌 사진의 시공 역시 결국 지속과 연속의 다차원적 결합체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전혀 다른 양태로 전환되는 시공간성과 인간의 경험이 지닌 가변성을 사진의 이미지로 붙잡을 수 있는가를 실험한다. 이는 사진의 평면 위에 입체의 대상을 냉담히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진으로만 가능한 리얼리티를 운용하여 살아있는 현존의 생명력과 현상학을 현시하려는 탐구에 다름 아니다.
사진과 현존의 관계는 불가분이다. 이제는 고전이 된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사진의 본질로 규정된 죽음 역시 현존의 이행이고, 결국 사진은 현존을 증명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사진이 드러내는 현존은 우리의 눈 앞에 보이는 대상과 더불어 그 대상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앎을 담보로 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존재의 '전체'를 볼 수 없지만, 우리의 앎을 통해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현우의 관심은 이렇게 전체를 볼 수 없는 현존과 그 앎의 결합 모두를 사진의 시각성 속에 포섭하는 일이다. 그가 네벨슨의 조각에 접근할 때, "나도 이런 시도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조각의 입체가 지닌 현존의 직접성을 사진으로 구현해 보려는 욕구였을 것이다.
나는 2022년 여름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어디에 지금 우리는?》 전시의 리뷰를 쓰기 위해 그에게 직접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근 1년 만에 이번 원고를 위해 그와 다시 만나 그간 진행해 온 작업을 보며 다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가 놀라운 진전의 여정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뜨거운 질문으로 젊은 사진작가들이 직면해야 하는 사진의 정체성과 가능성의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가운데, 이현우의 시도는 이런 문제에 대한 강력한 밀도의 답변이다. 거기에는 사진과 현존의 관계에 대한 매체적 사유가 있고, 이를 사진 이미지로 가능한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를 발견하고 파악하려는 기민한 실험이 있다.
- 월간 『사진예술』 2023년 7월호에서 발췌
- 홍성태, 디지털 문화의 세계, 진인진, 2022, pp. 58-59. ↩︎